잡설 100831 樂 - 音

1. 사람은 변한다. 오랜만에 알콜과 음악의 상승작용을 경험하고 나니 드는 생각이다. 학교 다닐때 유성의 모 호프집에서 일주일에 서너번은 죽치고 앉아 새벽까지 보스스피커에서 울려퍼지는 음악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신청곡, 맥주와 여러 밴드-아티스트에 대한 얘기, 새로 산 CD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지냈던 시절이 떠오른다. 그때만 해도 근처에 그런 문화적인 공간이 없는 삶은 끔찍한 것이라 여겼었는데, 내가 알던 그 누구도 내가 사람들이 북적이는 장소를 혐오하며 오지와 자연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 찬 삶을 살게 될 줄 알았으랴. 나는 더이상 LP와 CD가 가득 찬 카운터와 맥킨토시 앰프, 보스 스피커로 치장된 술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이팟과 차 안의 mp3 시디피로도 충분히 음악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땐 미처 몰랐었다.

2. 심지어 가장 최근의 애청 음반 중의 하나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폴리니의 연주로 듣는 피아노 소나타 23번은 아름답다. 베토벤답지 않은 상투적이면서도 투박한 멜로디가 두드러지지만 그래도. 내 삶에서 오랫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단어. 열정 - Appassionata.

3. 그 외에 최근의 애청 음반은 에미넴의 Recovery. 빌보드를 장악하면서 팬들의 열띤 찬사를 받고 있는 중인데, 정말 Marshall Mathers LP 이후 최고의 앨범, 아니 에미넴 디스코그라피 상에서 최고의 앨범이라고 할 만하다. 거의 전 곡이 빼놓을 곡이 없으며 굳이 잘 안듣는 곡이라면 Seduction, Cinderella Man 정도. 특히 첫 싱글컷인 Not Afraid는 가히 그동안 에미넴의 베스트 넘버라고 생각했던 Lose Yourself에 필적할 만 하다. 두번째 싱글컷이며 현재도 빌보드 1위를 달리고 있는 Love the Way You Lie보다는 오히려 No Love나 So Bad 등이 더 마음에 드는데, No Love는 순화되지 않은 언어를 담고 있어서 싱글컷되긴 어려울 듯.

4. 이어서. Recovery 시디 포장을 뜯으면서 미성년자 청취불가라는 스티커를 버리고 있자니 좀 우스운 것이 미국인과 크게 어렵지 않은 대화 정도는 가능한 내가 정신을 집중해서 들어도 가사의 30%정도밖에는 들리지 않는 판에 우리나라 중고생들에게 이런 경고 스티커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랩이라는 것이 물론 가사가 절반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만 언어가 다른 이들에게는, 나에게는 그 랩이라는 것이 음표의 의미밖에 가지지 못하는데 뭐 사람 나름이겠지. 중고생 중에도 나보다 영어를 잘하는 친구들이 많을 수 있으니. 하긴, 가장 잘 들리는 단어는 F word이니 뭐 그럴 수도 있겠다.

5. 나는 스튜디오 앨범에 비해 크게 퀄리티가 떨어지는 라이브를 그닥 선호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라이브에서 구현하기 어려운 사운드를 스튜디오 앨범에서 구사하는 데에도 좀 뜨악한 시선을 보내는 편이다. 에미넴의 T in the Park 라이브를 듣고 있자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실망스럽게도 절반 이상 립싱크를 구사하는 듯. 라디오헤드는 좀 재미있는 경우인데, Like Spinning Plates 같은 곡은 라이브에서 구현이 어려운 사운드로 가득차 있지만 뜻밖에 단순한 피아노 반주로 편곡하여 라이브에서 원곡 이상의 감동을 들려주기도 하고, 한편 라이브에서 쩔어 주었던 Videotape의 질주감은 오히려 스튜디오 앨범에서는 극히 단순화시킨 레코딩으로 날려버려서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기도 했다. 3인조 밴드들에 대해서도 좀 불안불안하게 생각하는 것이 최소한 두 대의 기타가 들어가는 꽉 찬 스튜디오 앨범의 사운드를 라이브에서 구현할 수가 없어 한 대의 기타로 썰렁한 사운드를 들려주는 것. Manic Street Preachers의 경우도 그렇고, 특히 뮤즈는 스튜디오 앨범에서 3인조치고는 정말 과도한 스케일을 구현한 바, 라이브 앨범에서는 효과음을 적용하여 억지로 그 사운드를 만들어 보려고 하지만 결국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보여준다. (그렇다고 라이브 앨범을 구매하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_-). 그 와중에도 미친듯이 달려주는 드럼이 그나마 라이브에서의 박력을 전해주는 정도.

6. 음악에 대한 열정과 소유욕의 경계선은 대체 어디까지일까. 사실 마음만 먹으면 t*****t나 s******k에서 불법으로 다운로드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반을 구매하는 것은 양심의 문제이기도 하고, mp3 실행이 가능하지 않은 환경에서도 음악을 들어야 할 때의 불편을 감수하기 싫어서이기도 하지만 그 음악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도 숨어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누가누가 어느 음반이 명반이고 한정판이고 어쩌구 하는 말에 현혹되어 구입했다가 잘 듣지도 않고 처박아 둔 음반들이 대체 얼마나 많은가를 떠올려 보면 그 소유욕을 잘 조절하는 것이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특히 REM의 초기앨범들. 숨겨진 명반 어쩌구 하는 말에 현혹되어 구입했지만 솔직히 내 취향은 아니었다.) 폴리니의 피아노 소나타를 듣다가 필 받아서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명반을 검색해 보니 accord라는 생소한 군소 레이블에서 발매된 바르샤바 오케스트라와의 차이코프스키-슈만 피아노 협주곡 라이브 녹음이 녹음 상태도 끝내주고 아르헤리치의 격정적인 연주도 발군인 명반이라는 소식에 혹해 구하려고 알아봤었다. 그러나 역시 군소 레이블에서 발매된 음반답게 국내 절판. 미국에서는 중고가 최소 50불 이상에 팔리고 있는 현실에 안동림 교수까지 자신의 책에서 명반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자 갑자기 소유욕 발동. 구하고 싶어서 안달하고 있는 중이다. 사실 다른 사이트에서 샘플로 들어본 슈만 피아노 협주곡이 별로 감흥을 주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안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경우 음악 자체보다는 희귀한 명반이라는 명성에 소유욕이 우선한 셈인데 대체 삶이란. 얼마나 더 어리석은 짓을 해야 채워질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덧글

  • 2010/09/01 15:0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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